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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logues

동아시아의 독서공동체에 대하여

  • 류사와 타케시〔龍澤武〕(전 헤이본샤〔平凡社) 대표편집국장)

서울회의를 위한 준비 회의 때, 제가 그저 생각나는 대로 무심결에 입에 올린 ‘독서공동체’라는 말이 발군의 주의력과 기억력의 소유자인 창비사 고세현 사장의 그물에 걸려서 본회의 모두(冒頭)보고를 해야만 하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뛰어난 편집자란 방심할 틈도 주지 않는 그야말로 아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제 말씀을 기조보고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독서공동체’라는 말은 ‘동아시아의 출판교류를 위하여’ 한국·중국·대만·홍콩·일본 등 각지에서 참가해 주신 출판인·편집자 여러분들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게 모르게 공유하고 있는 감각과 어딘가 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전 시대의 동아시아의 서적들에 대한 저의 작은 감상이라고 생각하시고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우선 제가 소속해 있던 헤이본샤(平凡社)가 45년에 걸쳐 간행해 온 『동양문고』에 포함되어 있는 두 권의 책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한국의 여러분들께는 잘 알려진 책입니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입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즉 1592년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으킨 일본의 조선침략전쟁시에 활약한 조선의 지식인정치가입니다. 히데요시군의 격퇴를 지휘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유성룡은 이 책을 임진·정유(丁酉)왜란 후, 고향 안동에 은거하면서 전쟁의 경위를 기록하여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집필하였다고 합니다. 『징비록』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재일 연구자였던 박종명(朴鐘鳴)선생의 훌륭한 일본어번역과 교정 및 주석 작업을 거쳐 동양문고에서 간행되었습니다. 판을 거듭하여 왔으며, 지금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원본은 문집 『서애집』에 수록되어, 유성룡의 사후인 1633년에 출판되었습니다. 흥미있는 것은 이 『징비록』이 일본에서 처음 등장한 초판은 1695(元祿8)년이라는 아주 이른 시기에 쿄토(京都)의 출판사 ‘야마토야이헤에(大和屋伊兵衛)’에 의해 간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야마토야는 분명히 상업출판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안타깝게도 그 활동상황에 대해서는 현재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일본사에서 겐로쿠(元祿)시대 즉 17세기 후반에 쿄토에는 이미 100개소를 넘는 서사(書肆; 서점이면서 동시에 출판사)가 있었다고 합니다(宗政五十緖 『근세경도출판문화의 연구』) . 야마토야도 아마 그 중의 하나로서, 19세기 전반까지는 쿄토의 출판동업자조합의 사료에 이름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한문서적이나 고전을 다루는 견실한 서점으로 1세기 이상 존속하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본의 출판이 근대는 물론 훨씬 더 이전부터 막부(幕府)나 조정(朝廷) 혹은 번(藩) 등의 ‘관(官)’이나 ‘공(公)’에 의한 출판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상업출판사 즉 우리들의 직접적인 선조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은 플러스적으로나 마이너스적으로나 모두 매우 특기할 만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전쟁이 끝난 지 400년 후가 아니라 불과 백년 후에 명(明)과 조선왕조의 연합을 고심 끝에 조절하여 히데요시군의 격퇴에 진력한 조선의 위대한 지식인이자 정치가의 회고록을 쿄토의 한 상업출판사가 간행하였다는 것은 대단히 놀랄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징비록』은 당시 일본에서 몇 부가 제작되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읽혀졌을까요? 안타깝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료가 전혀 남아 있질 않습니다. 하지만 상상을 넓혀갈 수 있는 하나의 단서는 있습니다. 그것은 야마토야가 간행한 『징비록』에 도쿠가와(德川)시대 초기의 최대의 계몽가이며 조선통신사와도 접촉이 있었던 카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이 서문을 썼다는 것입니다. 『징비록』의 독자는 반드시 지배적인 지식층이었던 무사계층에 한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카이바라 에키켄에 관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에키켄이 저술한 수많은 저작물들은 당시의 쿄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상업출판의 확대발전, 오히려 융성이라고 하여도 좋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한 상황을 만드는 데 하나의 동인이 되었고, 그리고 그 흐름을 타고 있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저작들은 분명히 부유한 상인층은 물론 중상층의 농민층에게까지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업출판이 최초로 융성해진 시대야말로 극작으로는 치카마츠(近松), 하이쿠의 바쇼(芭蕉), 소설의 니시즈루(西鶴)라는 작가들이 등장하여, 일본문학의 혁신이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 배경에는 겐로쿠 시대 이전의 칸분·엔포(寬文·延寶) 연간(17세기 중반)에 오사카의 근교농촌을 중심으로 급속도의 경제발전(신전개발, 상품작물생산, 비료 등의 산품 유통과 그것을 가능케 한 수운의 확대 등등)과 부의 축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독서방식도 결코 수동 일변도가 아니라 스스로 읽을 거리를 선택하는 능동적 독서였을 가능성조차 지적되고 있습니다주1 ♦. 어쩌면 빈틈없는 가미가타(上方) 상인 초대 야마토야 이헤이는 『징비록』을 광범위한 에키켄의 독자들에게 팔기 위하여 그에게 서문을 쓰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주2 ♦.

그리고 또 한 권, 동양문고에 포함되어 있는 서적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징비록』보다도 훨씬 더 기구한 운명을 걸어 온 서적, 중국 명대말기 1637년에 강서성에서 출판된 송응성(宋應星)의 『天工開物』 (Tiangong kaiwu) 입니다. 이 책은 농업기술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중국의 산업기술, 오늘날로 한다면 과학기술이라 불리는 것들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일종의 백과전서로서, 일본의 근세 도쿠가와사회의 산업·경제발전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天工開物』이 언제 일본에 건너오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일찍이 1694년에, 이것도 마찬가지로 貝原益軒입니다만, 그가 출판한 자신의 저작(『花譜』에 이 책을 참고도서로 들고 있습니다주3 ♦. 『天工開物』은 일본에서 18세기에 화각본(和刻本)이 출판되어주4 ♦, 널리 읽혀졌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많이 출판되었던 일본인 스스로에 의한 여러 가지 농서·기술서·계몽사상서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天工開物』은 중국에서는 이상하게도 그 후 오랫동안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 일본의 도쿠가와시대의 판본이 중국에 건너가 재평가됩니다. 더욱이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영국의 위대한 과학사가인 조셉 니담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이 책을 포함하여 전근대 중국사회가 보유하고 있던 고도의 과학기술문명의 내용이 서구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 책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1690년대의 어느 시기를 전후하여 일본의 독자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징비록』과 『天工開物』은,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 세계에서 서적이라는 것이 지니고 있었던, 지역횡단적이고 지속적이며 지적인 돌파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증에 불과합니다. 그 외에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예가 있을 것입니다. 일본은 대륙과 반도의 서적이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지적 돌파력의 은혜를 줄곧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오랜 동아시아의 역사 가운데 이 지역에는 확실히 ‘독서공동체’라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였다는 점입니다.

현대 프랑스의 역사가인 로제 샤르티에(Chartier, R)가 ‘독자공동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미국의 문학이론가인 스탠리 피쉬(Fish, S)의 ‘해석공동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 개념을 협의의 의미로 파악하면 ‘해석’을 같이 하는 ‘독자’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저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느슨한 즉 ‘해석’이야 어떠하든 간에 원래 ‘해석’의 전단계에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서적을 공유하는 행위, 같은 서적을 읽는다는 행위가 존재하였다는 것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석’은 말할 나위도 없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사회의 전통이나 문화의 맥락 안에 있어야만 비로소 그 ‘해석’이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나 공간을 달리 하는 세계에서, 동일한 서적이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여러 가지 작용, 여러 가지 탐구와 발견의 과정을 촉발시켜 왔다는 것, 그리고 독서라는 공통의 행위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 연결 안에 다른 세계(말하자면 타자)를 수용하거나 혹은 저항하면서 수용하는, 바꾸어 말하면 이해하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동아시아에는 과거에 시공을 초월하여 동일한 서적을 읽는 ‘독서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존재하였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연대가 존재하였던 것인가? 오래된 예만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중국의 고전적(古典籍)들과도 통했던 14세기 일본의 어떤 문인의 말이 매우 시사적입니다. 그는 책을 읽는 것을 ‘보지 않은 사람’을 ‘벗’이라고 하였습니다주5 ♦. ‘토모(友; 벗)’라는 일본어가, 인간의 세속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써 사용되는 것 자체가 매우 흥미로운 예가 되겠습니다만, 그 ‘벗’이 독서라는 행위를 통하여 ‘알지 못하는 세계’의 ‘벗’이라고 의식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버린 것이 분명한 일본 중세의 이 은자도 역시 동아시아 ‘독서공동체’의 일원이었던 것입니다.

에드워드 사이드(Said, E.)는 최근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번역출판된 유작 『인문학과 비평의 사명』Humanism and Democratic Criticism 에서, 오늘날 매우 긴요한 지적 과제는 인문주의적 비판정신의 옹호와 그것을 새롭게 단련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인문주의 정신의 근저에 갖춰야 할 ‘읽는 행위’, ‘정독하는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 스스로가 철저하고 의식적이 되어야 한다고 매우 긴박한 어조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즉, 비판적 인문학이란 ‘읽는 것’이다라고 사이드는 단언하고 있습니다. 주의 깊게, 폭넓게, 유연한 수용성과 저항을 동시에 가지는 “more receptively and more resistantly (if I may coin a word)” 읽기 행위agency가 비평의 핵이고, 나아가 비평이란 자유이자 계몽이며, 더욱 나아갈 수 있는 힘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출판이라는 일을 생각할 때, 이 읽는 행위의 중요성을 최초에 담당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저자가 아니라 편집자입니다. 저자는 읽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편집자 너머에 독서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독서를 동아시아에서 공동의 작업 혹은 행위로 하려고 할 때, 적어도 기술적인 곤란은 거의 해소되었습니다. 기술뿐 아니라 리터러시(literacy)는 물론, 각각의 교육체계의 고도화를 포함하여, 그러한 공동작업을 위한 전제조건이 이만큼 갖춰진 시대는 과거에는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서로 진실로 읽어야 할 서적들이 공유되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하기 곤란하지 않습니까? 동아시아의 독서공동체, 같은 서적을 읽고, 같이 사고하는 행위가 동아시아에서 진실로 공유되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오히려 전제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던 시대가 이 보이지 않는 독서공동체의 힘이 더욱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듭니다. 그러면 이제 최초로 읽는 사람들인 우리들 출판인·편집자는 공동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 서울회의에서 여러 가지 논의가 심화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바입니다.

(이 보고는 서울회의(2006년 10월 19일-20일)에서 보고된 것입니다)

Profile

류사와 타케시(龍澤武, Ryusawa Takeshi)

1945년 동경 출생.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대학 경제학부 졸업. 68년 헤이본샤 입사. 헤이본샤선서(選書)편집장, 대표 사전 서적 부장, 대표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96년에 히타치(日立) 디지털 헤이본샤 대표로 취임. 2000년, 당사 해산과 동시에 헤이본샤 퇴사. 헤이본샤에서는 카토 슈이치(加藤周一) 편집장의 지도하에 내부 편집장으로서《세계 대백과 사전》(전 35관)을 완성(1988)시킴과 동시에 사이고 노부츠나(西郷信綱)《코지키(古事記)주석》(전 4관), 후지타 쇼조(藤田省三)《정신사적 고찰》,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무연(無縁)・공계(公界)・락(楽)》 등 일본의 정신사, 역사학을 혁신시키는 저작의 기획 편집에 종사. 동양문고(東洋文庫)・헤이본샤 라이브러리 등의 기획을 발휘하는 한편, E. 사이드《오리엔털리즘》, F. 제임슨《정치적 무의식》 등 영미 이론서의 번역 출판을 추진. 90년대 후반에는 세계 대백과 사전의 데이터베이스화, 디지털화에 주력했다. 헤이본샤의 퇴사 후에는《계간・책과 컴퓨터》의 편집 위원으로, 또한 인문서 6사 연합에 의한 온디맨드 총서《리퀘스터》를 제창하여 간행. 현재 주식회사 트랜스아트 고문, 토요타 재단 이사, 호세이(法政)대학 강사.

Notes
주1 ♦
「에키켄본」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한문서적·고전적 등이 당시의 상층농민층을 핵으로 하는 독서층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 하는 문제는,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literacy의 존재방식이라는 아주 큰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시사적이라 하겠습니다. 즉 하나는 literacy를 ‘읽고 쓰고 계산하는’ 수준에서의 식자에만 환원시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인데, 이 시기의 일본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읽고 쓰고 셈하는’ 수준의 독서, 대중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가나초자 수준의 독서, 한문서적과 고전적 수준(사상서·문학서·역사서, 오늘날의 인문서에 해당하겠지요)의 독서 등등, 이른바 계층적인 literacy의 양태, 그 차이를 묻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코다 후유히코 「에키켄본의 독자」참조. 『貝原益軒』수록. 쿄토대학인문과학연구소, 「貝原益軒과 그 시대」연구반 보고서, 1995년, 平凡社」
주2 ♦
조선에서는 그 후 숙종 38년(1712년), 야마토야본 『징비록』이 간행되었다는 것이 문제시되어 역사서나 문집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가 취해졌다고 합니다.
주3 ♦
일본에서 농서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미야자키(宮崎安貞)의 『농업전서』(1697년)는 양광계의 『농정전서』(1637년)에 크게 영향을 받아 저술되었는데, 미야자키에게 『농정전서』등의 중국의 농서와 과학서를 가르쳐 준 것도 貝原益軒입니다. 단 『농업전서』에 대한 『천공개물』의 영향에 대한 일본농업사전문가들의 견해는 부정적입니다.
주4 ♦
『天工開物』의 훈독점, 오쿠리가나(읽는 방법)을 붙인 화각본은 1771년 오사카의 菅生堂에서 간행되었습니다. 관생당본의 원본은 오사카의 양조업자이며 당대의 문인이나 지식인들의 후원자였던 기무라 켄카도의 장서입니다. 이 관생당본이 1926년에 일본에서 지질학을 배우고 귀국한 유홍검(劉鴻剑)에 의해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주5 ♦
『츠레츠레구사』(徒然草)제13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