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logues
동아시아에서의 출판기획의 교류를 위하여
- 코지마 키요시〔小島潔〕(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편집국장)
오늘 이 회의에서는 세 개의 세션이 예정되어 있다. ‘책의 교류’와 ‘기획의 교류’ 그리고 ‘인적 교류’이다. ‘책의 교류’란 한중일 삼국에서 각각 출판된 서적들이 상호 번역되는 것을 주로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또한 ‘인적 교류’란 삼국의 출판인들이 여러 가지 채널을 통하여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것을 주로 의미하고 있을 것이다. 양자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모두 구체적인 것에 비하여 ‘기획의 교류’는 조금 알기 힘든 구석이 있다. ‘기획’을 ‘교류’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책과 사람이 교류하는 것과는 아주 다를 것이다. 혹은 ‘공동으로 기획한다’는 것과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
‘기획의 교류’는 종래의 번역출판을 통해서도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은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해외의 우수한 작품이나 시리즈가 번역소개되고, 그것이 자극이 되어 그 나라에서 유사한 작품이나 시리즈를 탄생시킨 예를 일일이 예를 들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이와나미쇼텐의 예를 들더라도, 예를 들면 이와나미문고는 독일의 레크람문고, 이와나미신서는 영어권의 펠리칸북스나 펭귄북스로부터 큰 자극을 받아 태어난 것이다. 출판의 역사는 기획면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영향관계의 역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이러한 의미에서의 기획의 교류라면 이미 책의 교류와 함께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형식으로의 교류가 존속하게 될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일본의 경우 이러한 종류의 ‘교류’는 종종 수동적인 태도 일변도였고, 또한 자의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왜 지금 새삼스럽게 ‘기획의 교류’를 강조하여야만 하는가?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종래형의 교류를, 책을 통한 ‘간접적인 교류’라고 한다면, 사람을 통한 ‘직접적인 교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삼국의 출판인·편집자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며, ‘기획을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분과의 ‘기획의 교류’라는 것은 애매한 표현이며, 잘 표현한다 하더라도 너무 고상한 표현방식이다. 좀 더 확실히 우리들은 공동기획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 낫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나의 문제는 그러한 물음이 왜 지금 등장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진실로 실현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하고 묻는 것이다.
한중일의 출판인이 공동으로 기획을 생각하자 등의 발상이 왜 나오는 것일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각국의 출판인이 각자 자신의 수단만으로는 지금 그들이 각각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도 나아가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의 문제도, 민주주의의 문제도, 문화의 문제도 그리고 말할 나위 없이 평화의 문제도 그 어느 것이든 과거에는 일국 내에서 해결이 되는 문제 혹은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라고 생각되어 왔지만(그리고 사실은 글로벌리즘이 이전 그 무렵부터 그렇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문제도 이 지역의 상호관계 안에서 개선되든가 악화되든가 하는 문제임이 확실해졌다. 일국만으로 민주주의는 절대 달성할 수 없다. 일국만으로 내셔널리즘을 결코 억제할 수 없다. 지역 전체가 거의 동시에 민주주의화하고, 지역 전체에서 동시에 내셔널리즘을 극복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지역의 출판인들이 국경을 넘는 협력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출판의 사명 중 하나가 자신이 속한 사회가 지닌 문제에 명확한 표현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사명에 충실하려고 한다면, 많은 문제는 국경을 넘어 버리게 되므로, 출판인도 국경을 넘어 문제의 확산에 대응하는 표현을 부여하여야 한다.
동아시아 삼국의 출판인이 ‘공동기획’을 만들어 낼 필요성에 대하여 이상과 같이 이해한다고 한다면, 그 다음엔 그러한 것이 실현가능한가의 여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실은 나는 이 ‘공동기획’이 매우 곤란하다고 예상한다.
나는 동아시아의 출판인들의 교류는 이번 회의가 처음인데, 학자·지식인의 교류에 대해서는 한일, 중일 각각 2개국 간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몇 번이고 참가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것들을 통해 나는 평생친구를 몇 명이고 만나게 되었지만, 동시에 개별적인 우정과는 별도의 차원에서 역사적 경험을 달리 하는 사람과의 상호이해·상호협력의 어려움도 질릴 정도로 맛보았다. 일상적인 경로를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갑자기 두 사람 앞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심연이 입을 벌리는 순간이 있다. 서로가 서 있는 장소, 거기에서 보이는 풍경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강력하게 느끼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몇 번인가 그러한 경험을 하고 나서, 나는 사람은 각자 그 배후에 독자적인 ‘역사적 지형(historical topography)’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은, 각자 독자적인 역사적 지형의 돌출부가 사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역사적 지형 위에서 보게 되면 원근감각도 대소의 균형도 다를 것이다. 그 역사적 지형에 공통성이 많은 경우, 그들은 같은 나라 사람이든가, 같은 문화에 속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즉 공통의 전망(혹은 원근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것은 ‘국민성’이라는 미신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조건의 문제인 것이다. 내가 ‘공동의 기획’의 실현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역사적 지형의 차이라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나라가 다른 경우, 이 역사적 지형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것은 종종 어떠한 사전의 예상을 뒤엎어버릴 정도의 것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 절대적인 차이를 자각하지 않고 ‘공동의 기획’을 시작한다면, 그것은 바로 동상이몽이며, 이윽고 불신감의 홍수 속에서 익사해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공동의 기획’은 불가능한 것인가? 앞의 내용들과 모순될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다지 비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주의깊게 진행시킨다면 성공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하와 같은 것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우리들은 어떠한 공동작업을 한다 하더라도 서로가 다른 역사적 지형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같은 말을 할 때에도 서로의 원근법이 다른다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공동작업은 우선 이와 같은 차이의 자각과 이해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생산적일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공동작업으로서, 우선 우리들이 근거하고 있는 각자의 지(知 )의 역사의 독자성을 밝힐 것을 제안한다. 각국의 지의 제도를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각국의 대학의 역사, 거기에서 학문들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라는 학문의 역사, 그리고 출판과 저널리즘의 역사가 중요한 테마가 될 것이다. 그러한 지의 역사적 지형의 차이를 이해한 다음에, 동아시아 공통의 ‘지금’을 되묻는 것도 가능해 질 것이라 생각한다.
(이 보고는 서울회의(2006년 10월 19일-20일)에서 보고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