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logues
저자는 편집자의 ‘의식(衣食)의 부모’이다
- 동 슈유〔董秀玉〕(중국 편집학회 부회장)
- 가토 케이지〔加藤敬事〕(원・미스즈쇼보 대표이사 사장)
편집자란 무엇인가, 저자란 무엇인가. 서로 다른 두 나라의 편집자가 한 사람의 저자와 작품에 관해 나눈 이야기.
저자가 되는 것이 좋은가, 편집자가 되는 것이 좋은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준비차 북경을 방문하여 둥 선생을 만난 것이 2005년의 봄이었지요. 그 때 둥 선생과의 이야기 중에서 ‘저자가 되는 것이 좋은가, 편집자가 되는 것이 좋은가’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둥 선생은 “편집자는 저자보다도 많은 책을 세상에 내보낼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지금도 인상깊게 남아 있습니다.
편집자라면 보다 많은 저자와 접할 수도 있습니다. 편집자는 반드시 무언가의 전문가일 필요는 없습니다. 편집자의 일이란 뛰어난 전문가나 작가(크리에이터)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나 독자가 원하는 것을 잘 생각하여 그들의 저작을 많이 출판해 내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것은 편집자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편집자의 지위나 역할이라는 것은 중국, 한국, 일본 각 사회별로 조금씩 다른 것이라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공통되는 것이지요. 어떤 책이 왜,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전문가들과는 달리 편집자로서의 판단이 요구됩니다.
편집자가 책을 만드는 중에 저자와 직접 만나는 일도 있는가 하면, 책을 통해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재직했던 출판사(미스즈쇼보)는, 지금도 번역서를 아주 많이 내고 있습니다만, 번역서의 경우, 저자와 만나고 싶어도 실제로 만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번역을 통해, 혹은 그 책을 읽음으로써 저자와의 교류를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양장(楊絳)이라는 중국의 지식인이자 작가인 여성이 있습니다만, 저는 1985년에 그녀의 『幹校六記』(‘幹校’란 문화혁명시기에 지식인들을 그 사상을 개조하기 위해 보냈던 ‘간부학교’의 약칭. ‘六記’는 청나라의 심복이 죽은 아내와의 생활을 담담하게 기록한『浮生六記』에서 따 온 것이다)라는 책을 번역하여 미스즈쇼보에서 출판하였습니다(나카지마 미도리 역). 이것은 아주 뛰어난 문학작품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중국문학이라고 자리매김하게 되면 책이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문화대혁명 하의 지식인의 기록이라고 하여 출판하였습니다.
그로부터 20년 정도가 지나, 작년 봄에 우연히 북경의 한 서점에서 양장씨의 신작 『우리들 세 사람』(三聯書店, 2003)의 포스터를 보았는데, 게다가 그것이 70만부나 팔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감개무량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양장씨의 책을 일본에서 최초로 출판한 편집자였고, 일본에서는 그다지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놀란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실은 동 선생은 양장씨의 편집자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겠지요(웃음). 그래서 우선 양장씨의 책을 편집하셨을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양장(楊絳)저『幹校六記』개정판(1992년, 중국 사회과학출판사) |
양장(楊絳)저『幹校六記』일본어 번역서日(나카지마 미도리 역, 1985년, 미스즈 쇼보) |
제가 편집을 담당했던 양장씨의 책은 산문집 『幹校六記』가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幹校六記』는 당초에는 홍콩의 광각경(廣角鏡) 출판사(Hong Kong Wide Angle Publisher)에서 1981년에 출판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당시로서는 아직 미묘한 문제였던 문화대혁명기를 다룬 것이었는데, 당시의 삼련서점의 편집국장이었던 판용(范用)씨가 이 책을 구해서 읽어 보고 제게 넘겨 주었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국내(중국)에서도 『幹校六記』를 출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즉시 양장씨에게 연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수개월 후에 북경의 생활·독서·신지 삼련서점에서 출판하였던 것입니다.
양장씨에게 관심을 가지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원래 양장씨의 산문을 아주 좋아했었습니다. 양장씨의 부군인 첸종슈(錢鍾書)선생의 글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웃음). 1970년말인가 80년대 초에 중국문학계에서는 ‘상흔문학’(1970년말의 문학사조)이 대두되기 시작하여, 작가들은 일제히 문화대혁명을 고발하였고, 그 공포와 슬픔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幹校六記』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양장씨와 첸종슈 선생이 비판투쟁 속에서 지낸 2년여의 생활입니다. 하방된 유핑보(兪平伯), 첸종슈라고 하는 위대한 지식인들은 농촌인 幹校에서 보일러작업, 소의 방목, 우물파기, 우편배달들의 일을 강제당하고 있었습니다. 양장씨는 이 책에서 당시의 정경이나 사색—예를 들면, 노동, 이별, 휴식, 애정, 행복, 몽상—에 대하여 함축성이 있으면서도 평이한 문장으로 잘 엮어내고 있습니다. “슬퍼하기는 하지만 상심하지 않고, 한을 삼키기는 하지만 분노하지 않는다(哀而不傷, 怨而不怒)”라고도 할 수 있는 담담한 문장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슬픔과 분노의 크기를 그 행간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幹校六記』의 번역서를 일본에서 출판하였을 때, 그 서평으로서, 중국문학을 잘 알고 있던 평론가가 ‘문화혁명을 고발하려면, 더욱 직접적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흔문학’을 더 평가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작자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그 작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지요. 체코의 작가로서 프랑스에 망명한 밀란 쿤데라가 그의 소설 『농담』에 대해서, 이것은 연애소설이므로 이것을 스탈린주의를 고발하는 문학이라고 말하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한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幹校六記』는 중국에서 100만부 이상 팔렸습니다. 그리고 일본어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지금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방후에 고령과 질병이라는 이유를 달아 많은 지식인들이 북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남겨진 사람들은 일평생 幹校에서 살아가야 함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귀경을 허락받지 못했던 첸선생과 양장씨 두 사람은 채원(菜園)에 남아, 양씨가 땅을 파서 지은 작은 움막을 가리키면서 “이 움막에서 살기로 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첸선생은 아주 심각한 얼굴을 하고 “책이 없잖아”라고 하였습니다. 양장씨가 “그 때 북경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세요?”라고 묻자, 첸선생은 “시간을 다시 돌리더라도 같은 행동을 했을 거야”라고 답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가혹한 상황에서조차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던 그들에게 크게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지식인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을 하더라도 전해지지 않는 것
양장씨의 책은 어쩐 일인지 일본에서는 그다지 팔리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제가 생각하건대, 양장씨의 작품은 소설 『洗澡』(일본어역 『風呂』 나카지마 미도리 역, 미스즈쇼보)를 포함하여 외국에서는 그다지 팔리지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상성으로 가득찬 심오한 산문작품이고, 동시에 거기에 묘사되어 있는 생활의 실상과 외국독자들 사이에는 너무나 큰 틈새가 있으니까요. 아주 세밀하고 미묘한 부분까지 이해할려면 그 배경을 알지 못하고는 힘들 겁니다.
과거에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일이 있습니다. 구 소련의 수용소에서의 하루생활을 써 내려간 작은 책입니다. 그 책도 세부적인 사항까지 아주 면밀하게 쓰여진, 어떤 의미에서는 비극입니다만, 그에 비하면 『幹校六記』는 유모어가 있습니다. 객관적이라고 할까, 대상과의 독특한 거리감을 가지고 쓰여져 있습니다. 아마도 그 책을 쓰는 방식이 일본인 독자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인 작가 중에는 양장씨처럼 무거운 내용을 가볍게 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지요.
이번에, 동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幹校六記』를 다시 한 번 더 중국어로 읽고 왔습니다. 새삼 느낀 것은 비교적 간결하고 산뜻한 문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본어로 옮기게 되면 원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습도를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번역의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 그 자체가 갖고 있는 특성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언어에 의해 유모어의 질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양장씨는 매우 명확한 문장의 기초를 가지고 있고, 게다가 보기 드문 유머리스트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그녀가 그 때까지 해 왔던 일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사실은 그녀가 첸 선생보다도 먼저 문학계에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1940년대 초기에 「마음가는 대로」(4막 희극)과 「진심에서 우러난 거짓말」(5막 희극)이라는 두 개의 각본을 써서 일약 유명해졌습니다(두 작품 모두 세계서국, 1943). 1943년에 「마음가는 대로」가 샹하이에서 공연되었는데, 당시 황재림이라는 유명한 영화감독이 그 무대감독을 행하였습니다. 주역 또한 유명한 번역자인 이건오가 담당하였습니다. 첸 선생의 대표작인 소설 『囲城』(일본어 역 『결혼광시곡』나카지마 미도리 외 역, 이와나미쇼텐)은 그 무대를 보고 돌아가는 길에 착안하였다고 양장씨가 말씀하셨습니다.
네 그랬었군요. 양장씨는 한편으로 서양문학의 연구나 번역도 하셨지요?
그녀가 한 번역 명작 중의 하나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인민문학출판사, 1978)입니다. 그녀는 1957년부터 『돈키호테』의 번역에 착수하였는데, 그 때 스페인어 원서 외에도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의 번역본을 수집하여 자세하게 연구한 뒤에, 스페인어 원서를 번역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스페인어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스페인어를 배워 가면서 21년의 세월을 투자하여 『돈키호테』의 번역을 완성하였던 것입니다. 그 만큼 그녀는 노력하는 작가였던 것입니다. 그녀의 번역서는 『돈키호테』의 모든 번역서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70만부 정도 팔렸습니다. 대단합니다.
양장씨의 작품 중에서 인상깊은 것은, 영국의 작가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대해서 썼던 「어디가 좋은 것인가」라는 엣세이입니다. 거기에서 양장씨는 오스틴의 말을 인용하고 있지요. ‘이 세계는 이지로 이해하면 한 개의 희극이고, 감정으로 이해하면 한 개의 비극이다’라고. 정말 훌륭한 표현입니다. 양장씨의 문학은 영국문학의 전통을 강하게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믹한 스타일이나 유모어의 센스 등등 영국문학의 전통과 중국문학의 전통이 매우 훌륭하게 혼합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지식인이나 작가, 특히 양장씨와 첸 선생은 오래된 고사 등을 좋아하여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외국의 독자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일지도 모릅니다. 문장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고사의 출처를 모르면, 그 내용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매우 곤란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뛰어나 번역이라 하더라도 그 의미가 완전히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幹校六記』의 모두 장면에, 간부학교로 출발하는 지식인의 선두에 서 있던 70세를 넘긴 노대가이자 홍루몽 연구의 대가이신 유평백(兪平伯)선생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극적인가를 상상하는 것은, 분명 외국인 독자에게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중국의 학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기 때문이지요. 대개 일본어 번역을 출판할 때, 제목을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 것인가를 참 많이도 고민하였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원제목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웃음). 그리고 또 하나 다른 양장씨의 소설 『洗澡』는 『風呂』(목욕)라고 번역하여 출판하였습니다.
『洗澡』를 그대로 직역하셨군요. 우리들은 ‘정풍’운동(사상작풍과 작업작풍의 정돈운동)을 하는 것을 ‘목욕’이라고 합니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입니다만, 외국인에게는 그 뉘앙스가 전달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풍’의 의미는 일본어로 하게 되면 ‘세뇌’라는 말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이것도 고사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風呂』라는 제목에 약간의 해학적인 요소도 있기는 하지만, 당연히 그 의미는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양장씨의 에세이집『將飮茶』도 번역되었습니다만, 그 책의 일본어 제목이 『차를 드세요』(나카지마 미도리 역, 헤이본샤)이므로, 이것도 직역입니다.
『將飮茶』 중에 「孟婆茶」라는 산문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중국의 옛날이야기인 「孟婆茶」(맹파는 명부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의 전생을 담당하는 여신의 이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맹파차를 마시고(생전의 일을 모두 잊고), 나하교(죽은 자들이 건너는 다리)를 건넌다는 고사로서, 여기에서는 죽음과 가까운 상황이라는 뉘앙스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양장씨는 이와 같이 자신의 문장 안에 고사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그래도 일본어 번역서들은 중국의 원문에 가장 가깝습니다. 그에 비해 프랑스어 번역서는 거의 알지 못하는 것 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번역을 해도 잘 전해지지 않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특히 그러한 것이 양장씨의 문학의 깊이이기도 하고, 본질적인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그것을 뛰어 넘어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되겠지요. 또 한편으로, 일본인에게 잘 알려진 중국의 작가로 노신이 있습니다. 노신의 문장은 일본어 번역문보다 역시 건조한 데가 있습니다. 아마도 중국과 일본의 언어 사이에 놓여져 있는 감성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노신이 일본인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번역을 통해서 아주 잘 전달되는 곳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신(魯迅)의 문장은 원래 명쾌하고 전략적이기 때문에, 번역을 하더라도 알기 쉬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양장의 문장은 ‘면직물 뒤에 침을 감추고 있다’고 할까, 일견 면직물이면서, 그 내용은 매우 날카롭고 깊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점을 우선 번역자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그 저자의 의도를 전하는 것도 어려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두 지식인—첸종슈와 양장
그런데 중국에는 양장과 같은 매우 지적인 산문의 전통이 있습니까?
양장은 자신이 어떤 작가를 선호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와 같은 필치로 유명한 중국의 산문작가로는 예를 들면, 歐陽脩, 柳宗元, 陶淵明 등의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양장은 1940년대에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었습니다만, 일반에게 잘 알려지게 된 것은 『幹校六記』나『洗澡』등의 작품이 출판되고 나서였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중국의 여성작가로서 그녀의 존재는 오랜 기간 동안 묻혀져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문장력과 생활능력,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가정 내에서 큰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이야말로 일가의 기둥이라고 양장씨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부군이신 첸선생의 입지를 세워 주고, 자신의 존재는 지극히 작게 만들어 첸선생을 전면적으로 뒷받침해 왔던 것입니다.
양장이 쓴 각본으로 올려진 두 개의 무대를 보고 돌아가는 길에 첸 선생이 그 유명한 『囲城』을 쓰기로 결정하였을 때, 그녀는 “좋아요, 꼭 쓰세요. 제가 도울께요”라고 하였답니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고, 생활도 편안하지 않았으며, 첸 선생이 시급제로 대학강사를 하여 가계를 꾸려가고 있었는데, 선생이 소설을 쓰게 되면 필연적으로 일하는 시간이 줄게 되지요. 그래서 그녀는 절약하기 위해서 그 때까지 고용하고 있던 여급을 그만두게 하고, 스스로 가사일을 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 모습은 정말 옛날부터 전해오는 전통적인 모습이지요.
당시, 첸 선생은 전혀 무명의 작가였습니다만, 양장은 첸 선생의 작품을 최초로 읽은 독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첸 선생은 『송시선주』(인민대학출판사, 1958)을 집필하는 동안, 하나하나의 주를 반드시 양장에게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다음 주의 집필로 넘어가고, 잘 모르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고쳐 쓰는, 그러한 작업을 둘이서 해 왔던 것입니다.
첸종슈 선생의 『송시선주』는 헤이본샤의 동양문고에서 전4권으로 번역본이 나와 있습니다만(송대시문연구회 역주, 2004-05), 그렇다면, 말하자면 양장은 첸 선생의 편집자였던 것이네요.
그녀가 없었다면, 첸 선생의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첸 선생의 『管錐編』은 문화대혁명 중에 조반파에 몰수당했던 것을, 양장씨가 위험을 돌아보지 않고 도로 가져온 것입니다. 『槐聚詩存』은 모두 양장씨가 스스로 한 글자 한 귀절을 옮겨 쓴 것이고, 첸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출판된 작품집(『錢鍾書集』, 삼련서점, 2002)은 양장씨가 정리한 것입니다. 그것 외에도 양장씨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정리한 것으로 『錢鍾書手稿集』(상무인서관, 2003)이 있습니다.
그래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중국여성의 위대한 일면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첸 선생과 양장은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잉꼬부부로서, 두 분은 따님인 첸유안(錢瑗)과 함께 자주 문자놀이(시나 고전 등의 어구에서 그 전거를 서로 알아맞히는 놀이)를 하였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중국의 문인들의 전형적인 가정상이었습니다. 그 댁을 방문할 때마다 뵌 것은 두 분이 각자의 책상에 앉아 독서하는 광경이었습니다. 양장은 “독서는 ‘串門兒’(수다를 떨며 돌아다니는 것)처럼 정말로 즐거운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누군가와 만나기 위한 예약이 필요 없습니다. 유명한 분을 만나뵈러 갈 때에는 우선 그 약속을 잡는 일이 어렵고, 그 분이 100년 전의 분이라면 그것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음으로써 언제든지 그것이 가능하며, 흥미가 없으면 책을 덮으면 될 것이고, 돌아갈 때 딱딱하고 어려운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것이야 말로 “타향에서도 이웃끼리”와 같은 것이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전체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독서라는 행위밖에 없습니다, 라는 것이지요.
실로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그렇나 자세는 양장이 쓴 문장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중국에는 그와 같은 지식인이 있다는 것을 일본인들이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자에게 바짝 다가서서, 저자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편집자와 저자의 관계에 대하여, 저희들은 출판계의 대선배들로부터 “저자는 우리들의 ‘의식(衣食)의 부모’이다”라고 배웠습니다. 저자를 존중하는 것은 편집자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고,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편집자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시장경제화가 진전되고 있는 요즈음, 하나의 작품, 한 권의 책을 최량의 방법으로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서 편집자가 수행해야 할 역할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양장의 『우리들 세 사람』을 출판할 때에도 편집자가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책이 실제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 세 사람』의 경우, 우선 7만자의 원고를 받았는데, 우리들은 사진도 싣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는 오히려 사진을 많이 사용하는 책을 만들자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원고를 읽고 이 아이디어를 각하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양장의 문장은 한꺼번에 읽어 내려감으로써 그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므로, 사진을 많이 사용하게 되면 문장의 흐름이 끊기고, 그 맛을 손상시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사진을 컬러로 하자는 안도 있었습니다만, 이것도 각하시켰습니다. 컬러인쇄는 원고의 내용과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몇 번이고 편집방침을 논의하였고, 그 결과 사진 매수를 줄이고, 흑백인쇄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책 전체에서 가정의 따스함을 연출하기 위하여 따님의 시와 그림, 그리고 양장의 친필캡션을 사용하였습니다. 따님의 그림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양장이 잘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진은 부부와 따님 세 분이 모두 들어 있는 사진을 중심으로 선정하여, ‘우리들 세 사람’이라는 컨셉을 의식하여 편집하였던 것입니다.
양장(楊絳)저『우리 세 사람』원서(2003년, 생활・독서・신지삼련서점)
그 성과는 아주 훌륭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책의 설계와 내용이 잘 어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님의 그림도 훌륭하고, 친필의 캡션도 “우리들 삼인가족”의 따스한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어서, 실로 깊은 맛을 풍겨주고 있습니다.
선전도 소박하게 하였습니다. 양장은 매스컴에 등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녀의 따님의 친구분들이나 따님의 제자분들과 대담하였고, 그것을 선전에 사용하였습니다. 즉, 우리들은 편집자로서 그녀의 책을 많은 독자들이 읽도록 하기 위하여, 그녀 자신은 세상에 소개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네, 그렇게 생각한다면, 양장의 책이 일본에서 팔리지 않은 것은 일본측 편집자의 책임일지도 모르겠습니다(웃음).
그런데 『우리들 세 사람』은 동 선생께서 기획하셨습니까?
실은 그랬답니다. 당시 첸선생과 따님인 첸유안(錢瑗)이 모두 입원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병상도 말기였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문제가 있어서 양장씨는 크게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고민하기보다는 우선 세 분 가족의 이야기를 써 보시도록 권하였습니다.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의의가 있는 일”이라고…. 그녀는 저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첸선생과 따님이신 첸유안(錢瑗)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우리들 세 사람』중에, 제가 가장 감동을 받은 것은 따님이 돌아가실 때의 모습에 대해 쓴 문장입니다. 당시 첸 선생께서도 4, 5년간 병석에 누워 계셨는데, 그러한 와중에 따님이 먼저 죽었습니다. 중국에는 “백발인이 흑발인을 보낸다(부모가 자식의 장례를 치르는 것)”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가장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도 양장은 그 사건을 결코 ‘눈물어린 이야기’로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준 것은, 양장이 꿈을 꾸는 장면이었습니다. “딸은 먼 곳으로 갔다. 웃는 얼굴로 갔다. 갑자기, 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피인지 살인지 모를 큰 덩어리가 가슴 한 구석으로부터 떨어져 내렸다. 나는 당황하여 그것들은 주워서 다시 내 가슴 속에 집어 넣기로 했다.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라는 문장이었습니다.
그녀가 묘사하고 있는 고통과 슬픔은 사람의 심금을 울립니다. 양장의 자택에서 그 원고를 읽었을 때, 저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들의 투병생활의 일부를 알고 있었고, 양장씨의 가슴 속 아픔을 아주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홀로 남겨진 그녀는 굳은 의지로 『우리들 세 사람』을 완성함으로써, 자신의 일을 다 해냈던 것입니다.
저자에게 바짝 다가서서, 저자의 모든 것을 알게 된 동 선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책도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군요.
저 자신, 편집자라는 직업은 자신에게 아주 잘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좋아하는 일입니다. 오랫동안 이 일에 종사해 왔습니다만, 한 사람의 편집자로서 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저자로부터 교육을 받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한편으로, 편집자도 나름대로 저자에게 제안하지 않으면, 좋은 작품은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작품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능력에 따르는 것이고, 그것은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기획을 세우더라도 그것 만으로 뛰어난 작품이 만들어진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죠. 물론, 우리들 편집자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저자를 존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저자는 우리들의 물질적 생활의 버팀목임과 동시에, 정신적 생활의 지주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이번에 동 선생과 만나 대담을 나누면서 “책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라는 것을 진실로 실감하였습니다.
(2005년 11월 11일 중국·북경의 일석문화에서 )
